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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우편함은 비어 있었다

by 망인생 2025. 6. 30.



비는 그쳤지만, 땅은 젖어 있었다.
여자는 오늘도 같은 길을 걸었다. 어깨에는 오래된 가방 하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이 도시에 이름이 없다.
아니, 한때 있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 스스로도.

그녀가 머무는 곳은 버려진 우체국.
우편은 오지 않고, 편지도 가지 않는다. 그저 퇴색한 세계와 조용히 함께 늙어갈 뿐.

우편함은 37개,
그중 ‘0번’ 우편함만 매일 열어본다.
비어 있다.

그녀는 오늘도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써내려간다.
잉크도 말라가고, 종이도 곧 떨어지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편지를 부치기 위해 쓰는 게 아니니까.

그녀는 단지,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그 기억을 되짚어 적는다.

그날의 대화.
그날의 표정.
그날 손끝에서 떨어져 나간 말 한 조각.

어느 날, 한 아이가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말없이, 오래된 우편함 앞에 섰다.
그리고 낡은 종이 하나를 꺼내 우편함 ‘0번’에 밀어넣었다.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이상하네요.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그런데 당신을 매일 봅니다.”



그녀는 천천히 종이를 접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날 밤, 처음으로 웃었다.

다음 날, 그녀는 사라졌다.
가방도 없이.
짐도 없이.
기억도, 없이.

‘0번’ 우편함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가끔, 문득 생각난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보다,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일이 더 외로울 수 있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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